의로움(義)이란 약자의 마음을 챙기고 살피는 것(3)

중국 최초의 휴머니스트 묵자

정병태 교수 | 기사입력 2020/11/05 [22:17]

의로움(義)이란 약자의 마음을 챙기고 살피는 것(3)

중국 최초의 휴머니스트 묵자

정병태 교수 | 입력 : 2020/11/05 [22:17]

 [강건문화뉴스=정병태 수석기자] 공자의 유가(儒家) 사상은 인()과 예()를 통한 도덕적 인간의 완성을 근간으로 한다. 어진 인()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이자 윤리라는 것이다. 즉 유가의 기본 노선은 옛것을 따르고 전하자는 것이다. 반면 묵자는 옛것을 배우기도 하고 또 새로이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옛것 중에 좋은 건 배우고 전해야 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은 과감히 버리고 새롭게 창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묵가사상의 창시자 묵자  © 정병태 교수

 

천민 출신의 위대한 실천가 묵자(墨子)의 제자는 300명이었고 그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묵자를 따르는 집단 대부분은 군인과 수공인 그리고 농업인들이었다. 전쟁 시에는 곧바로 의용군이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이 묵자 무리들은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나라(기원전 202-220)에 들어와서 200여 년의 번영을 마감하고 중국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묵자 집단은 묵자의 사상에 감화되어 스스로 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자신의 삶에 이행했다. 묵자는 세상을 이롭게 하고, 겸애사상을 가르치러 다니기 위해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책회남자(淮南子)’수무훈(脩務訓)에 의하면,

너무 바삐 돌아다니느라, 묵자는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었다.(墨子無暖席 묵자무난석)라고 했다. 당시 제자 백가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학자마다 묵()이라는 글자를 두고 설명이 분분하다. 묵자의 묵()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데 첫 번째는 묵자의 살이 검었다, 두 번째는 묵자의 이마에 먹을 새기는 형벌인 묵형을 받았다. 아무튼 묵자는 직접 노동하는 위치, 즉 천민이라는 점이다.

 

<묵자(墨子)>는 총 71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53편만 전한다. <묵자>의 내용은 정치, 경제, 윤리, 철학, 군사 그리고 자연과학과 논리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첫 편은 <친사(親士)>로 시작한다. 여기서 ()는 지식인을, ()은 곧 가까이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묵자는 시작부터 천민의 희망과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묵가사상

 

전국시대의 초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는 묵가(墨家)의 시조인 묵자(墨子)이다. 당시 묵가사상은 지배적인 학문이자 사상이었다. 그래서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는 유가와 묵가 두 사상을 춘추전국시대에 양대 현학으로 크게 흥행했다고 하였다. 물론 선발주자로 제자들을 키워 계승 발전시켜 자신의 사상을 펼쳤던 공자다. 그래서 묵자도 유가사상을 배웠고 가르쳤다. 그런데 나름 공자의 사상과 유가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더 나은 방안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래서 묵자가 사용한 가르침들은 모두 공자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묵자는 철저한 혁신론, 실리주의를 제창하여 공자의 사상과 유교의 예()를 비판하고 겸애(兼愛: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 상현(尙賢: 어진 사람을 존경함, 반귀족적 인재등용론), 절용(節用: 절약하여 아껴 씀)등을 가르쳤다. 그래서 묵자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주로 무인과 천민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진()나라에서 전문 관료와 군인들()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통일 제국 진(BC221206)이 얼마 안가 아주 허망하게 무너졌다. 묵자의 사상을 따랐던 대부분의 무리들도 진()나라와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묵자의 사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거기에다 묵가(墨家)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은, 묵가사상 자체가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상이었다는 점이다. 하루가 다르게 흔들리는 사회에서, 국가의 확고한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묵가사상은 먹힐 수가 없었다. 묵가사상이 싹트고 숨 쉬고 뻗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지 못했다.

 

결국 한()나라 이후 묵자와 그의 사상은 철저히 외면당해야 했다. 그 이유는 묵자(墨子)가 유가를 매우 강도 높게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유가와 그 사상이 위선적이고 형식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공자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그런데 한()나라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유가 사상이 중국 역대 왕조의 통치이념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그 어디에도 묵가사상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 중국 최초의 휴머니스트 묵자  © 정병태 교수



하늘은 뜻이 있어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아우르기를 원하는데,

여기서 함께한다는 것은 의로움()을 나타내며,

의로움()이란 약자의 마음을 챙기고 살피는 것을 말한다.

 

<묵자>, ‘천지(天志)’ ()

 

 당시 공자 사상은 여기 저기 장황하게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나누어져 뻗어 나아갔다. 당연히 정치와 신분이 비교될 수 없었던 묵가사상은 선택받지 못했다. 사마천이 쓴 <사기> 맹자와 순자 이야기 끝머리에 겨우 스물 네 글자가 전부다. 묵가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여불위가 펴낸 <여씨춘추>에서는 묵자의 제자와 무리들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했다. 묵가사상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맹자 역시 묵자의 철학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그런데 왜 묵가사상이 웅성하게 성장하지 못했을까? 다시 강조하지만 당시 유가 사상이 줄곧 사회 전반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묵자(墨子)를 고대 중국 최초의 휴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묵자가 꿈꾸었던 희망을 오늘날 우리가 나누었으면 한다. 지금도 묵자의 겸애(兼愛)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기초적인 문화와 생활보장을 누리고, 각자의 기술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받고 그들의 권리가 보호되는 그러한 세상을 여러분과 함께 펼치고 싶다.

    

정병태 수석 기자 jbt69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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